[신윤창소설] 인식의 싸움 64. 사업개발팀(21)

M&C 계약 조인식은 신대리의 체크 리스트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계약서 싸인 후 기념촬영할 때 신대리도 박성준의 등떠밈에 마지못해 제일 뒷줄에 서서 결국 사진 속 인물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마치 브로드웨이 데뷔에 성공한 신인배우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이 모두 그 하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눈 부신 플래시 빛에 간신히 눈을 뜨며 순간순간 투영되어 떠오르는 그 간의 고생을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껏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몇 장의 사진 촬영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대리는 거의 2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끝나고 강남역에서 함께 뭉친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간의 고생을 맘껏 날려 보내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신대리는 마음 속으로 즐거울 수가 없었다. 팀원들에게 얘기하지 못한 비밀을 이제는 털어 놓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2차로 나이트 클럽에 춤추러 가자는 박성준의 제의를 거절하고 신대리는 조용한 바(Bar)로 자리를 옮겼다.



"대리님, 오늘 같은 날 갑자기 왜 이리 심각하시죠?"

박성준이 여느 때와는 틀린 신대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우리 일단 한잔씩 들자. 다들 수고 많았고, 우리 모두는 축하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들 모두를 위하여, 건배~"

신대리의 건배 제의와 함께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한잔 가득 목으로 넘기고는 약속이나 했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과일안주 하나를 가득 베어 문 그들을 바라보며, 신대리는 다시 한번 한 잔 가득 씩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깨끗이 비운 뒤에야 약간의 뜸을 들이며 미안한 감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 이 얘기를 너희들에게 미리 해주었어야 하는데, 미쳐 말을 못해서 미안하다."

조윤희와 박성준은 갑자기 심상치 않은 느낌에 자리를 당겨 앉으며 무슨 일인지 주의를 기울였다.

"다음 주, 그러니까 10월 1일자로 나는 다시 마케팅 이팀장 밑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계속 여기 사업개발팀에서 다른 브랜드들을 검토할 것이며, 나는 M&C 마케팅 BM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순간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조윤희와 박성준은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은 후에 박성준이 술 한잔을 단 숨에 들이킨 후 말했다.

"그러니까 대리님이 배반 때리겠다 이거군요? 우리 함께 하기로 했던 거 아닌가요? 대리님만 간다고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박성준은 매우 화가 났다. 계약이 체결되면 신대리와 함께 마케팅부에서 다시 일할 것이라는 꿈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동안 신대리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애써 변명은 하지 않을게. 단지 나도 처음엔 너도 함께 가기를 바랬다는 것만 믿어줘. 그런데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어. 누군 이팀장 밑에 나 혼자 다시 들어가고 싶겠니? 난 독립적인 팀이 구성되길 희망했는데, 경영진에서 아직 시기상조라며 당장은 이팀장이 M&C를 맡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버렸어. 그런 상황에서 네가 함께 간다고 좋을 일도 아닐 거야. 사업개발팀도 윤희씨 혼자서 송팀장님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네가 윤희씨와 함께 하며 좀 기다려 주길 바란다."

"아니 이놈의 회사는 어떻게 이팀장 같은 사람에게 이런 중요한 브랜드를 맡길 수가 있데요? 참내 한심하다 한심해...."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른 박성준은 이젠 화살을 이팀장에게 돌려 욕설을 퍼부우며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조윤희는 이미 이런 일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것 같았다.

"대리님, 그간 참 힘들었지만 즐거웠어요. 꼭 마케팅부에서 M&C를 성공시켜 주세요. 저도 직접 해보고 싶었지만, 마케팅 경험도 없고 저는 안될 줄 알았어요. 어쨌든 대리님이라도 우리를 대표해서 그간 우리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해주시길 바랄게요."

조윤희는 여전히 착한 마음처럼 그 말 또한 고왔다. 신대리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조윤희와 잔을 부딪쳤다. 박성준은 홧김에 쉬지 않고 계속 독한 술을 여러 잔 들이마시더니 어느새 탁자에 고개를 파묻고 잠이 들어 버렸다.

신대리와 조윤희는 남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조윤희는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계속 잘 알겠다고 되풀이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신대리를 위안했다. 그렇게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후에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박성준을 억지로 깨우고 간신히 택시를 태워 보낸 후에 신대리와 조윤희는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마시며 찬 바람에 애써 술을 깨우려 하였다.

두사람은 더 이상 할말도 없이 우두커니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둘은 뭐라 말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발길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일산 쪽에 사는 신대리가 부른 택시가 5분내로 온다는 연락이 온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윤희는 집이 가까우니 걱정 말라는 말만 남기며 뛰어 가듯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려고 하였다.

순간 신대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댕기며 한껏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떨리는 가슴에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 가늘게 떠는 그녀의 어깨의 미동만이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콜택시가 도착했다는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 그 길고도 짧았던 시간은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연인들처럼 안타까웠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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