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벤에 대해 가장 잘 정리된 메타분석은 2008년 CIR의 보고서다. 파라벤에 대한 세상의 거의 모든 논문을 분석한 이 보고서를 보면 이은주와 구희연이 열거한 위의 연구결과들은 화장품의 위해성과는 관련이 없다.
이것은 모두 동물을 대상으로 한 고용량 섭취 혹은 투약 실험의 결과다. 이것은 단지 파라벤의 독성(toxicity)을 확인한 것일 뿐 화장품의 위해성(risk)을 확인한 것이 아니다. 화장품은 고용량으로 먹고 주사하고 흡입하는 것이 아니다. 피부에 조금씩 바르는 물건이다. 화장품의 노출 방식과 사용량, 함량을 고려하지 않고 동물 독성시험 결과를 무작정 대입하는 것은 올바른 위해평가 방식이 아니다.
CIR 보고서는 한국 식약처, 캐나다 보건부, SCCS 등의 감독기관과 여러 권위 있는 과학지가 검토를 마치고 신뢰성을 인정했다. CIR은 이 보고서를 2012년에 재검토하였고 수정할 것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보고서의 결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파라벤은 화장품에 사용되는 함량에서 정상적인 피부에 좀처럼 자극적이지 않다. 물론 일부 개인은 파라벤에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 … 지난 20년간 수렴된 알레르기 패치 테스트 결과를 보면 파라벤에 양성 반응을 보인 환자들의 비율에 큰 변화가 없다.
● 파라벤이 표피를 통과하여 체내로 흡수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전문가 패널은 피부에 바른 파라벤의 대사는 피부 내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 파라벤이 피부 내에서 거의 모두 분해되기 때문에 체내로 흡수될 수 있는 파라벤은 1% 정도밖에 남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모든 데이터를 종합할 때, 우리 전문가 패널은 파라벤이 기껏해야 아주 약한 에스트로겐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자면, 파라벤의 에스트로겐 수용체와의 결합효율은 에스트라디올(여성호르몬)보다 4자릿수(10,000분의 1)가 낮았다.
● 우리 CIR 전문가 패널은 메틸파라벤, 에틸파라벤, 프로필파라벤, 아이소프로필파라벤, 부틸파라벤, 아이소부틸파라벤, 벤질파라벤이 화장품으로 사용되는 방식과 함량으로서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파라벤에 대한 음해를 공고히 한 또 하나의 세력은 피현정이다. 그는 “파라벤은 방부제 역할을 하지만 피부에는 알레르기를 유발하고 심하면 피부암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파라벤을 계면활성제, 광물성오일과 함께 ‘반드시 피해야 할 성분 3가지’로 꼽고 파라벤이 성분표의 중간에 적혀있거나 여러 종류가 적혀있는 제품에 가차 없이 ‘탈락’을 외친다.
파라벤이 피부암을 유발시킨다고 말한 피현정의 경향신문 기사 링크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106232116065&code=900312
파라벤에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화장품 속 파라벤과 피부암과의 관련성은 아예 제기된 적도 없다. 파라벤은 국제암연구소(IARC) 발암물질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도대체 이런 단정적인 정보를 어디서 읽었기에 이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걸까?
파라벤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을 보면 화학적 지식은 둘째 치고 성분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성분표에 대해 너무나 단선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파라벤이 1개가 적혀있으면 괜찮고 3개가 적혀 있으면 위험할까? 파라벤이 성분표의 가운데에 적혀있으면 함량이 높고 마지막에 적혀 있으면 함량이 낮을까?
파라벤은 단일성분 0.4%, 혼합성분 0.8% 이하로 배합된다. 화장품회사들은 단일성분으로 최대함량을 넣을 수도 있지만 혼합성분으로 오히려 함량을 더 떨어뜨릴 수도 있다. 1가지를 사용해도 0.4%를 넣을 수 있고 3~4가지를 혼합해서 사용해도 총 함량은 0.1~0.3%밖에 안 될 수도 있다.
또한 성분표는 1% 미만으로 함유된 성분을 함량 순으로 적을 필요가 없다. 함량이 높아도 맨 끝에 적으면 그만이다. 또 순서대로 적는다 해도 요즘처럼 ppm 단위로 함량이 적은 성분이 많으면 파라벤의 위치는 성분표의 위쪽으로 올라간다. 그러니 파라벤이 성분표의 중간에 적혀 있어도 오히려 마지막에 적혀있는 다른 상품보다 함량이 더 낮을 수도 있다.
성분표의 정확성이 이처럼 떨어지는데 무조건 파라벤의 위치와 개수에 따라 ‘탈락’을 외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며 해당 화장품을 개발한 사람에 대한 횡포다.
식약처는 위험을 관리하는 곳이다. 위험관리를 잘 못하면 수많은 피해자는 물론 국민의 질타로 권위를 유지하기 힘든 곳이다. 5,500만 국민의 피부건강과 국민보건을 책임지는 곳인데 어떻게 감히 성분의 안전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더 예민하게 접근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식약처다.
손 놓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시중의 제품을 수거하여 파라벤 함량이 제대로 지켜지는 조사하고 논문검토, 노출량평가, 위해평가를 거듭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규제를 강화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파라벤 규제 수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매우 엄격하다. 미국은 몇 가지 금지성분을 정한 것 외에는 화장품제조를 기업의 자율에 맡기기 때문에 파라벤 관련 규제가 전혀 없다.
일본은 단일성분이든 혼합사용이든 총 1.0% 이하면 된다. 유럽은 메틸과 에틸은 0.4%, 부틸과 프로필은 0.14%로 제한하고 혼합사용은 0.8%로 제한한다.
우리나라는 메틸, 에틸, 부틸, 프로필, 아이소프로필, 아이소부틸을 모두 단일성분 0.4%로 제한하고 혼합성분 0.8%로 제한한다. 2014년 유럽연합이 아이소프로필, 아이소부틸, 페닐, 벤질, 펜틸 등 5종의 파라벤을 금지했는데 우리나라는 당시 이미 벤질과 펜틸을 금지하고 있었고 2015년 페닐도 금지했다. 아이소프로필과 아이소부틸은 CIR과 SCCS의 리포트, 그리고 식약처의 자체 위해평가를 거쳐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그대로 사용을 허락하고 있다.
2017년 식약처가 실시한 부틸, 프로필, 아이소부틸, 아이소프로필의 위해평가 결과를 보면 이 성분들을 법정 최대 함량으로 단독 및 혼합사용 시 안전역이 600~1,199로 산출되었다. 평생 펑펑 사용해도 안전한 함량을 1로 볼 때, 그것보다 600~1,199배 안전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 4종의 파라벤을 치약 및 구중청량제와 동시에 사용할 때에도 안전역이 334~463으로 산출되었다.
(※ 참고: 화장품 위해평가_부틸·프로필·이소부틸·이소프로필 p-하이드록시벤조익애씨드.pdf
https://www.nifds.go.kr/brd/m_271/down.do?brd_id=197&seq=12516&data_tp=A&file_seq=1 2017년 식약처)
화장품회사들이 안전에 신경 쓰지 않고 위험한 파라벤을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시중에 나온 제품들은 모두 식약처가 만든 배합한도를 철저히 지켰고 안전성 테스트도 거친 것들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파라벤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빠져서 요즘은 오히려 화장품회사들 스스로 파라벤을 쓰지 않는 추세다. 또한 유럽연합이 부틸과 프로필을 0.14%로 제한하고 유아용 엉덩이 부위에 바르는 제품에는 이 두 성분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 두 성분도 사용량을 아주 낮추거나 쓰지 않는 추세다.
실제로 2015년 식약처가 국내 유통 화장품 100종을 대상으로 부틸, 프로필, 아이소부틸, 아이소프로필의 함량을 분석한 결과 부틸파라벤은 0.14% 이하, 프로필파라벤은 0.16% 이하, 아이소부틸 및 아이소프로필파라벤은 0.01% 이하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식약처는 분주하게 위험을 평가하고 화장품 안전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화장품회사들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의 눈치를 보고 식약처의 규제보다도 한 발 앞서 더 안전한 화장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을 믿지 않고 파라벤이 독하다, 발암물질이다, 위험하다, 피하라며 선동하는 자들의 말을 더 믿는다.
EWG,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 피현정. 이들이 식약처보다도, 국내 최고의 위해평가 전문 과학자들보다도 더 똑똑한가? 이들이 성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깊은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고 있는가?
파라벤 관련 자료(대한화장품협회 '화장품 성분 사전' 참조)
미국화장품협회(PCPC)의 파라벤 자료 번역(https://www.kcia.or.kr/cid/Document/Menu/FRAME.asp)
국제화장품규제협력체(ICCR)의 화장품 보존제 FAQ (https://www.kcia.or.kr/cid/Document/Menu/FRAME.asp)
▶ ‘성분표 읽어주는 여자’(https://blog.naver.com/the_critic/221365584964)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화장품비평가 최지현은...
일요신문 외신부, 뉴스위크 한국어판 번역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문작가이자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우연히 폴라 비가운의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를 읽고 브랜드와 가격에 휘둘리지 않고 성분만으로 화장품을 구입하자는 데 공감, 번역했다고 그는 말한다. 화장품회사의 터무니없는 광고나 근거 없는 미용 정보를 바로 잡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밝혔다. 베스트셀러인 〈명품 피부를 망치는 42가지 진실〉의 공동 저자이다. 현재 블로그 ‘성분표 읽어주는 여자’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