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중국시장에서 살아남기 [中] 파블로프의 개

사드 보복·물량 떼기·가격 훼손…중국 시장에 매몰되는 K-뷰티

‘파블로프의 개’는 벨을 울리면 개가 침을 흘린다는 사실을 발견한 연구다. 벨을 울리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조건형성은 본래 관계가 없던 두 가지 현상이 몇 번 같은 시기에 일어나면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원래 없던 자극으로 똑같은 반응이 일어나면 이후부터는 자동적으로 뇌에 회로가 형성된다.


더 나아가 벨을 울리고도 먹이를 주지 않는 등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면 개도 점차 침 흘리는 반응이 제멋대로가 된다. 반응이 거꾸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파블로프는 이를 ‘역설적 단계’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면 개는 혼란스러워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책하든지 아니면 상대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두려움에 떨며 안색을 살피게 된다.


세뇌는 안정제에 의존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불안감에 휩싸이게 한다. 역설적 단계에서는 지배하는 사람의 긍정적 반응이 안정제로 작용한다.


인간 행동을 조작할 수 있다는 파블로프의 생각은 냉혹한 기업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K-뷰티가 중국 시장에 목을 매달수록 고슴도치가 된 빅2를 제외한 중소기업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못하다.



* 장면 3


J대표는 중국에 갈 때마다 골치가 지근거린다. 거래처와의 계약 성사 단계마다 끼어드는 경쟁업체 때문이다. 합의한 내용보다 더 싼 가격과 조건을 내미니 거래처가 망설이기 일쑤라는 것. 다년간 거래하다 보니 물량 떼기에 치여서 중국 거래처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기자가 만난 유통상들은 모두 겪은 보편화한 현상이다. 왜 그럴까? 물어보면 △치열한 경쟁 △한탕주의 △나만 살면 된다는 소아병적 기질 △글로벌 거래 원칙의 미준수 △한국식 덤핑 등 이유는 다양했다.


이젠 중국 현지 유통사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인 줄 빤히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도리어 한국산 화장품 수입으로 덩치를 키운 중국 업체들이 되레 한국 기업 인수에 나선다.


* 장면 4


유통질서보다 더한 피해가 가격 훼손이다. 한국 업체들이 깎기 경쟁으로 가격대가 무너져, 업체마다 골머리를 앓는다. C 대표는 “중국 상인들에게 한국 화장품 기업은 봉이다. 부르는 가격을 20-30% 깎고 나서 협상에 나선다”며, “이젠 웬만한 화장품은 20%를 지키는 게 마지노선이 될 정도다. 마스크팩은 0.5% 떼기가 아니라 마이너스도 감수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을 소비자가 알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 과정은 대충 이렇다. 중국 측이 한국 업체의 간을 보는 식으로 여기저기 견적을 넣고 저울질한다. 이에 대해 한·중 에이전시 S대표는 “한국 업체들은 처음부터 솔직하게 자기의 조건을 다 얘기한다. 그리고 정직하게 거래하고 있다고 과시한다. 나 같은 거래처는 찾아보기 힘드니 당장 계약하자고 서두른다. 처음부터 패를 술술 다 보여주니, 중국 업체는 잘 듣기만 하면 된다”며 한국 기업들의 협상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다음 중국 업체는 연락을 뚝 끊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한국 업체는 “나한테 문제가 있나? 잘못 말한 게 있나?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왜 그러지?” 등등 애만 끓는다. 한국 기업이 이제나저제나 연락 기다리다가 끌탕을 치고 포기할 즈음, 갑자기 중국 업체에서 연락이 온다. “상담하고 싶다”고.


중국 업체들은 보통 4~6개월 후에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고, 그런 다음 맞춤한 업체에 연락 하는 것이다. 그러면 쏜살같이 중국으로 건너가 상담을 벌이는데, 그전 조건보다 더 양보하지 않으면 절대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국 시장을 놓고 한국 기업끼리의 제 살 깎기 경쟁은 실익이 없다. 유통과 가격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우(愚)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 장면 5


B대표는 “한국 화장품 업계는 동북 4성”이라고 말한다. 현지 업체와 거래를 트고 나면 상황이 역전된다. 물량에 목매달다 보니 유통질서나 가격은 ‘사례별(case by case)’로 된다. 중국 독점권을 요구하고,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도중에 다른 기업과 사업을 진행하는 등 딴 살림을 차리기 일쑤다. 그는 “이미 중국 밴더들에 ‘made in Korea’는 마케팅을 위한 동북 4성의 생산기지며, 한국 중소기업들은 그들의 주문을 맞춰주기만 하는 하청업체일 뿐”이라고 전했다.


또 중국 로컬 브랜드는 한국의 마케팅 전문가와 연구원들을 무더기 스카우트, 진용을 갖추고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연구원들의 포뮬라를 통해 한국산 ‘me too’ 제품 양산 채비를 갖췄다고 보면 된다. 중국 로컬 브랜드의 한국 생산기지화는 상당히 진행됐다는 게 그의 얘기다.


ODM 업체들이 대규모 투자와 중국 현지 생산으로 기세를 올리지만, 뚝심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잡을지 고양이가 될지는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은 ‘관행이 굳어지면 불편하더라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는 심리를 갖게 한다는 위험성을 알려 준다.


다만 벼랑 끝에 몰리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행동을 180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코치가 선수를 학대행위에 가까울 정도로 다그치는 것은 숨은 의미가 있다. 새로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극한 상태에서 가치관의 역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드 보복이 1년여를 넘기면서 한계 상황이 오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슴도치 전략’으로 내실을 다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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