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요즘 대리님 눈치 보느라 힘들었어요.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지, 뭐라 말해도 들은 척도 안하고, 일도 모두 다 저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신대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티 안내고 혼자서 잘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박성준 눈에는 그의 행동들이 이상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신대리는 얼른 그의 입을 막으며 말을 했다. “성준아~ 잠깐만, 우리 회의실에서 얘기 좀 할까?” “네? 아~, 그러지요.” 박성준은 역시 이상하다는 듯이 신대리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을 했다. “그러게, 뭔 일 있는 거죠?” “아냐? 뭔 일은…. 그냥 벌써 연말이라 나도 덩달아 기분이 들뜨네” “사실 저는 대리님이 다른 회사로 떠나는 거 아닌가 생각도 했어요. 사실 저 같아도 그래요. 회사에서 잘 알아 주지도 않는 조사나 하고, 입사한지 몇 년 안 된 저도 벌써 권태롭기까지 하니…. 입사동기들은 저보고 한직이라 부럽다고 하는데, 저는 정말 짜증 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동안 대리님 눈치 보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이 참에 얘기해도 될까요?” “아, 그래? 그 동안 너무 신경 못써줘서 미안해. 무슨 얘기인데?” 신대
지점장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나는 10개의 대리점에 쉬지 않고 매일 나갔다. 그러나 실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리점 사장들과 이야기하면 할 수록 각 대리점 마다 보이지 않는 매출에 대한 어떤 벽같은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목수로 일하고 계시는 먼 친척으로부터 문을 짜려면 먼저 ‘문틀’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들었던 문 만드는 과정을 보면, 먼저 싸구려 각목으로 문틀을 맞추고 나서, 그 문틀에 맞게 고급 원목의 문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문틀을 벽에 딱 알맞게 제대로 짜지 못하면 나중에 만든 고급 문이 맞지가 않아, 결국 비싼 문을 폐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멋진 문이라도 문틀에 맞춰야만 하고, 그 문틀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순간 이것이 바로 대리점 사장들의 문제였구나 하고 어떤 깨달음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대리점 사장들은 자신의 매출의 한계를 이런저런 비용이나 세금문제 및 시장환경 등의 사정으로 스스로 문틀의 한계를 지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A대리점은 월 3천만원, B대리점은 4천만원, C대리점은 5천만원... 항상
다음 날 신대리는 오전 업무를 간단히 정리하고 바로 늘상 해왔던 것처럼 안테나 매장에 방문하겠다는 핑계로 회사를 나와, 회사와 떨어진 조용한 까페를 찾았다. 그는 어제 만든 아미앙떼 현황 및 문제점 리스트를 가지고, 앞으로 이를 입증하기 위해 보강해야 할 자료를 수집할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4P 측면에서 접근해 보기 시작했다. 제품(Product) 측면에서 보면 이미 브랜드별 판매실적 분석 및 제품에 대한 고객 반응 등이 그 동안 잘 정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다음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미앙떼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후속 브랜드를 출시해야 할지에 대한 답이 없었다. 결국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아미앙떼가 잘 안된 근본 원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었다. 먼저 문제를 알아야 해결 방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격(Price)과 유통(Place) 측면에서는 한 가지만 빼고 더 이상의 조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가장 잘되어 있었다. 장려금 및 할증 정책에 의한 가격할인은 갈수록 심해지고 신유통으로 부각되고 있는 브랜드숍과 홈쇼핑 등 때문에 대리점과 화장품전문점 체제의 붕괴는 더욱 가속화되어 가고 있어, 이를
다음 날 아침, 신대리는 술이 덜 깬 눈으로 간신히 출근하였지만, 정신만은 또렸했다. 어제 밤에 이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은 보고서를 술김에 확 치워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마음을 비우고, 자리에 쓰러지듯 앉아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컴퓨터를 켰다. 오늘따라 유난히 컴퓨터 부팅되는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기다리는 동안 문득 어제 강소장과 나눴던 얘기가 생생하게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있는 박성준이 문제였다. 분명, 혼자 하기 벅찬 일이지만, 박성준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아니라 생각됐다. 게다가 별도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 자칫 이팀장 귀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위장도 해야 한다. 문득 지난 번에 읽었던 손자병법의 군쟁(軍爭)편에 나왔던 구절이 생각나자 그는 얼른 책을 꺼내 다시 한번 찾아봤다. ‘선지우직지계자승(先知迂直之計者勝)’, 즉 가까운 길을 돌아가는 법을 먼저 아는 자가 승리를 거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우위직, 이환위리(以迂爲直, 以患爲利)’란 말도 생각났다. 해석하면 돌아가는 길이 곧장 가는 길이 되어, 나의 어려움을 유리함으로 만들어
“아니 말이야….” 한사장은 말을 꺼내려다가 열을 참지 못해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닫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좀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그는 의외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신입사원에게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하고, 아무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말이야~!” 한사장은 또 다시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그간 참았던 불만들을 한 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담당 바뀌자 마자 이럴 수가 있나, 어? 내가 주문도 안 한 것이 아침부터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단 말이야. 오늘 물건 들어온 게 얼마인지 알아? 사람이 숨돌릴 시간을 줘야지,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찌 이리 밀어내고 지랄들이야? 내가 지난 번에 회사 들어가서 또 한번 밀어내면 식칼로 다 찔러 죽인다고 한 거 알아 몰라? 그런데도 또 밀어내? 네 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 아냐?” “네? 아…, 저….” 상황파악이 잘 안된 나는 당장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단지 오늘 아침 장대리가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하던 중에, 지점장이 얼굴 한 구석 가득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처음이라 고생 좀 할 꺼야’ 하면서 슬쩍 던진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
그래도 나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산재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늦도록 10개의 대리점 중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방문하였다. 그렇게 회사에 복귀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서 나만 혼자인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매일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외근 중에 발생했던 일을 정리하고, 주문 받았던 것을 전산에 입력하는 일을 마치고 나서야 퇴근하였다. 그렇게 집에 와서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을 먹을 때가 보통 10시였으니, 집에서 9시 뉴스를 본적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연로하신 어머니가 매일 밤 늦게 음식을 차려주시는 일도 내겐 큰 아픔이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간신히 어머니를 설득해서 서울을 벗어난 경기도 화정 쪽의 작은 오피스텔을 빌려 독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은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힘든 일만 시켜서 나를 내보내려고 했던 지점장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맡았던 문제 대리점들의 매출이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회사에 버림받고 용산전자상가에서 제품을 사입해서 팔 던 곳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회사에서 매입하는 실적은 바닥을 친 곳들이나 다름없었으니 더 이상 떨어질 것도 없는 공포의 외인구단 같
“그러니 시간 많은 네가 해야지. 아니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잘 들어봐. 이팀장은 어차피 김상무 사람이야. 그리고 자신이 출시한 브랜드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 하려고 들지 않아.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팀장 몰래 준비해야 하는 일이 필요하단 말이야. 난 지금 우리회사가 이 정도로 어려워진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김상무와 이팀장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미앙떼처럼 고보습 화장품은 이제 아무나 다 만드는 시대라고. 콜마 코스맥스 같은 데서는 그보다 더 좋은 제품도 돈만 가지고 오면 마구잡이로 찍어내고 있어. 그런데 이런 비차별적인 제품으로 시장에서 경쟁을 하려니 우리만 죽어나도록 힘든 거 아니냐?” “알아, 나도 그 문제는 보고서에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어. 그런데 뭐, 아무도 새겨 듣지를 않더라고.” “신대리, 너 진짜 멍청한 거니, 아니면 순진한 거니?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가 데리고 있는 팀원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어? 아마도 네 의견은 사장님까지 가기가 쉽지 않았을 꺼야. 중간에서 이리 고치고 저리 고쳐서 왜곡된 보고가 갔을 거라고. 나야 네가 직접 보내주니까 그 동안 도움이 되었지만….” “진짜? 설마…. 그 동안 이팀장님이 나를
“그러다 보니, 지금 시장에 깔아 논 미수금이 장난이 아냐. 어느 화장품전문점이 담보를 제공하고 장사하겠니? 게다가 요즘은 브랜드숍이 증가하면서 전문점들도 수시로 사라지고 있는 판인데, 이렇게 제대로 된 담보도 없이 계속 거래하다가 큰 전문점이 몇 개 터지면 말이야..., 그대로 난 쪽박 찬다, 쪽박...! 신대리 생각해봐. 솔직히 말해서 이게 내 사업이라면 그런 위험을 감수라도 하겠지. 위험 부담만큼 내가 노력하면 돈이라도 많이 버니까 말이야. 그런데 회사 월급만 받고 계속 이렇게 영업하다가 부실 채권이라도 떠안게 되면, 회사는 분명 내게 물어내라고 할 것이 뻔하잖아. 처음엔 부실채권도 그리 얼마 안 되어서 할증과 장려금으로 나름대로 조정하면서 떨어냈는데, 그게 어느새 조금씩 쌓이더니만, 이대로 1년만 더 가면 수 천만 원이 될 것 같아. 나중에는 월급에, 퇴직금까지 못 받고 쫒겨 날까 두렵다, 두려워~. 그런데 이런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겠어. 뒤늦게 영업소장 된 친구들은 아직 이런 사태까지 파악을 못하고 있어. 게다가 최상무님까지 그만 두신다고 하니….” “뭐? 최상무님이 그만 두신다고?” “응. 최상무님은 원래부터 직영영업소 확대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