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업계 매출 500~5000억원대 중견기업이 작년에 대거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적을 발표한 상장 14개사 중 네오팜과 한국화장품제조를 제외한 12개사가 매출액 감소 또는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했다.
업계 상위 빅4를 제외한 차세대 그룹의 위기는 한국화장품산업의 기반이 그만큼 튼튼하지 못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이 적절치 못하다는 반증이다. 더욱이 재벌그룹 또는 유통 공룡들이 화장품산업에 뛰어들면서 유통과 PB브랜드를 양 날개로 하는 사업전략을 펴고 있어, 과연 K-뷰티의 경쟁력과 차별성을 어떻게 지속 발전시켜야 하는가라는 커다란 고민을 안게 됐다.
먼저 브랜드숍 위기는 3년째 지속 중이다. 사드 보복이라는 외부영향도 컸지만 내수 부진을 탈피할만한 전략 부재가 더 뼈아프다. 유통 판도가 H&B숍 또는 멀티브랜드 매장으로의 급격한 이동, 온라인 채널 재편에 따라 시장 전체 파이에서 점유율을 깎아먹고 있다.
공정위 자료에 따르면 국내 화장품 로드숍 가맹점 수는 4,440개(‘16)→4373개(’17)이었다가 작년에는 20% 감소한 3500여 개 수준으로 추정된다. 더페이스샵→네이처컬렉션 등의 편집숍 변경이 이뤄지고 있지만 중소 브랜드는 계약기간 만료로 인한 자연감소분을 지켜만 보고 있는 입장.
한국화장품, 에이블씨앤씨, 클리오, 토니모리, 잇츠한불 등이 적자전환 내지 큰 폭의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했다. 에이블씨앤씨는 “H&B숍을 통한 중소브랜드의 시장 진출로 내수시장의 경쟁 심화”를, 클리오는 “국내 클럽클리오 및 중국 오프라인 시장 정체로 인한 매출 및 이익 감소”를 부진 원인으로 제시했다. 잇츠한불은 “중국향 매출 감소 및 내수부문 경쟁 심화”를 이유로 꼽았다.
매출액도 한국화장품이 1%대 증가했을 뿐 대부분10%대 감소를 겪었다. 문제는 아직 바닥이 아니라는 점. 이 때문에 브랜드사별로 직영, 가맹점을 자의 또는 타의로 축소하는 트렌드다. 남는 재원은 온라인이나 홈쇼핑, 해외사업에 집중하는 등 체질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DB금융 박현진 애널리스트는 “중소 브랜드의 비용 효율화 작업이 2019년 실적을 나아 보이게 만들겠지만 내국인 수요가 회복되지 않는 한 매출 성장률이 크게 개선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OEM·ODM의 빅2는 시장지배력에 힘입어 1조원대 매출과 큰 폭의 영업이익(한국콜마 34%, 코스맥스 49%)을 기록했다. 하지만 브랜드사에 비해 수혜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 코스메카코리아, 코스온, 제닉 등은 영업이익 감소를 기록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유통 대기업 빅2의 재하청 가격 인하 및 중국 히트 기업들이 오더를 무기로 가격을 후려치고 있어 중소 OEM·ODM업체는 엄청 어려운 곳이 태반이다. H사의 경우 생산 마진이 너무 짜서 겉으론 남고 속으론 밑져 지분 70%를 넘기는 등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업체가 대부분의 중견 ODM업체들이다”라고 전했다.
제닉은 “경쟁심화에 따른 수익성 악화, 글로벌 고객사 확대를 위한 품질, 생산 설비투자 확대”를, 코스온은 “화장품사업 확장에 따른 고정비 증가”를 각각 실적 악화 이유로 꼽았다. 즉 최근 3년간 ODM업종의 공장 신·증설 바람을 타고 설비를 잔뜩 늘렸지만 고정비 증가를 뛰어넘을 매출액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빅2 외 ODM 중소 업체에 대한 가격 갑질은 여전하며, cGMP 인증이 없는 대부분 기업은 일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규모가 큰 ODM사의 재하청 물량을 겨우 받아서 운영하고 있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NH증권 조미진 애널리스트는 “△H&B숍, 온라인몰, 홈쇼핑, 멀티브랜드숍 등 유통채널 다각화로 신규 브랜드의 시장 진입 저변 확대 △온라인과 SNS를 활용한 제품 홍보가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브랜드가 빠른 주기로 판매되는 양상 확산 △국내외 브랜드 업체간 경쟁 심화와 해외 판매 확대 등 OEM·ODM업종에 유리한 시장 환경이 조성되면서 ‘시장의 주연’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중소 ODM업체의 대규모 영업이익 적자는 업종 내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 손성민 연구원은 “중국 특수에 취해 사드 보복이 금방 진정될 거라는 희망적 가정을 전제로 2, 3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는 동안 능동적 대처를 하지 못했다”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시장의 불안정성을 이제라도 예측해 플랜A, 플랜B 등 ‘시나리오 플래닝’을 명확하게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영의 신’ 피터 드러커는 “혼돈의 시대에 가장 큰 위험은 혼돈 자체가 아니라, 어제의 논리로 혼돈의 시대를 맞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중견기업의 경우 기존 전제에 의문을 가지고 새롭게 판을 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