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이 재무관련 서적들과 송팀장의 영어자료에 파묻혀 끙끙거리는 신대리를 보고 박성준이 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가 보았으나, 신대리는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마치 모니터 속에 빠져 버린 듯, 화면 속 엑셀표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대리님… 대리님…, 신대리님~~!” 참다 못한 박성준이 결국 큰 소리로 그를 불러 깨웠다. “앗~! 깜짝이야~!, 뭐야~, 갑자기 큰 소리로 부르면 어떡해? 깜짝 놀랐잖아?” “아니, 제가 몇 번을 불렀는데요?” “에잇, 아무튼… 귀찮게 왜 그래?” 신대리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오히려 박성준은 더욱 놀라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조윤희가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대리님, 뭘 그리 골똘히 혼자서만 고민하세요? 저희도 좀 같이 하면 안 되나요.” 조윤희의 말에 신대리는 이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박성준과는 사뭇 다르게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 이거? M&C 투자에 대한 사업 경제성 평가지표를 만들고 있는데, 이게 좀 어려운 거라서~.” “아니, 대리님, 이거 사람 차별하는 것 아니어요? 제게는 신경질을 부리더니만, 윤희씨에게만 너무 잘 대해주는 것 아니어요?”박성준의 투정에
2주가 지나도록 미셸리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그 동안 사업개발팀 네 명은 일이 잘 안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애만 태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송팀장은 미셸리에게 몇 번 연락을 취했지만, 그녀가 계속 외근 및 출장으로 사무실에 없다는 비서의 되풀이 되는 대답뿐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5월이 하염없이 지나고 6월의 첫 번째 월요일 아침, 송팀장은 출근하자마자 습관처럼 이메일부터 체크하였다. 언제나 변함없이 받은메일함에는 점점 증가하는 스팸 메일들이 그의 눈과 머리를 어지럽혀 왔다. 그는 따분히 화면을 넘겨 가며, 혹여나 그 중에 뭐 하나라도 건져 볼만한 게 있나, 두꺼운 뿔테 안경 속 졸린 눈에 힘을 주어 갔다. 그러다 그는 마침내 수 많은 한글 제목들 속에 파묻혀 있는 불어 메일 하나를 발견하였으니, 바로 미셸리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 메일은 마치 진흙 속의 진주처럼 유난히 도드라지게 눈에 띄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송팀장은 바로 메일을 열어보고는 큰 기쁨에 “Yes, Oh~ yes”를 외쳤다. 세 사람이 뭔 일인지 의아해 하며 송팀장을 바라보자 송팀장은 이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미셸리에게서 드디어 메일이 왔어요. 1주 전
“전 사실 참으며 계속 일하려고 했는데, 이젠 못 참겠어요. 어제도 번역하는 일 다 끝낼 수 있었는데, 팀장님이 자꾸 다른 일을 시켜서 제대로 하지 못한 거에요. 근데 그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회사 일도 아니고 다 팀장님 사적인 일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더 열 받는 거죠.” 송팀장은 업무의 반 이상을 사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의 일이 그녀에게 비밀스럽게 주어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마치 송팀장의 개인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님, 저는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대리님이랑 하는 M&C프로젝트 일은 재미있는데, 팀장님 비서 같은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면 차라리 회사를 더 다니고 싶지 않을 정도에요. 지난 5개월 동안 프랑스 대사관, 상공회의소 및 팀장님 주변의 인적 네트워크를 위하여 상당히 많은 자료가 오갔는데, 저도 처음에는 이 일들이 모두 회사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이제 저도 일이 돌아가는 것을 잘 알게 되니, 그 일 대부분이 팀장님 개인적 모임 및 관계유지를 위한 사적인 일이더라고요. 그런데도 대리님은 혼자 회사업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이와는 반대로 팀장이라는
순간 고요한 침묵을 깨고 조윤희가 기지개를 활짝 펴며 말했다. “대리님, 다 된 것 같은데요?” 신대리는 마치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아득히 조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응? 드디어 다됐나?” “한번 보실래요?” “뭐, 봐봤자, 내가 불어를 알아야 말이지? 아무튼 수고 많았어. 나도 덕분에 오랜만에 책 좀 읽었네” “내일 아침에 팀장님 검토하신 후 바로 파리로 보낼게요.” 신대리는 토요일에도 출근하여 투정하나 없이 활짝 웃으며 결국 제 몫을 다 끝낸 지금의 그녀가 잘 꾸민 세련된 모습의 평상 시 보다 더욱 예뻐 보였다. “그럼, 휴일에 고생했는데 얼른 들어가서 푹 쉬자.” “그냥 들어가요? 대리님, 옆 제과점에서 팥빙수라도 먹고 들어가요. 저 오늘 이렇게 고생했는데, 시원한 것도 하나 안 사줄 건가요?” 지금까지 남자들 하고만 근무해왔던 신대리는 처음으로 함께 일하는 여직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시원한 생맥주에 대한 간절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그녀를 따라 마지 못해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여자와 단둘이 팥빙수를 먹는 것도 몇 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와 연애했을 때 이후로 처음인 일이었고, 업무시간이 아닌 휴일에 그
박성준은 현장에서 바로 퇴근을 하였지만 신대리는 저녁이 다되어 사무실로 복귀하였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조윤희의 번역 일부터 챙겼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많아진 분량의 사업계획서를 다 끝내지 못하고, 토요일에 나와서 마무리 짓겠다는 약속의 말뿐이 할 수 없었다. 애초에 M&C 본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영어가 아닌 불어로 번역하기로 했기 때문에, 신대리도 지금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었던지라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는 책임감 있게 일하는 그녀에게 미안함과 대견함을 느끼며, 그저 뒷 일을 부탁한다는 위안과 격려의 말만 해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오후, 계획서가 걱정이 된 신대리는 여지없이 발길을 사무실로 옮겼다.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습한 무더위에 그는 숨이 턱 막혀왔다. 초여름 오후의 무더위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꽉 막힌 작은 사무실은 마치 사우나에 처음 들어가는 것처럼 한 순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환경에 적응이 된 신대리는 그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 놓고 겉 옷을 벗어 놓고는 사무실을 죽 둘러봤다. 책상 여기저기에는 흩어져 있는 자료만 눈에 뜨이고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조윤희의 책상 위에
다행히 밤 12시가 되기 전에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집이 먼 조윤희는 10시쯤에 이미 퇴근 하였고, 신대리와 박성준만 변함없이 늦은 밤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미 프린트가 된 하나의 사업계획서를 신대리가 마지막 검토를 하는 동안 또 다른 하나의 사업계획서가 더디게 인쇄되고 있었다. “대리님, 우리도 레이저 프린터 하나 신청하죠? 다른 팀이 쓰다 넘긴 이 놈의 잉크젯은 속도가 너무 느려 답답해서 일 못하겠어요.” 인쇄를 기다리는 것이 마냥 답답하다는 듯이 박성준의 푸념이 또 터졌지만, 신대리는 별 다른 대꾸 없이 마지막 한 장까지 검토를 마무리했다. “첫 번째 안은 오타가 몇 군데 있는 것만 빼면 별 문제 없겠는데, 일단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다시 인쇄하지 말고 이걸로 내일 보고할게. 근데 둘째 안은 아직 인쇄 안됐어?” “그러게 인쇄가 너무 느려서 안되겠다니까요. 그래도 이제 두 장 남았어요.” “그래? 그럼 인쇄된 것부터 먼저 볼게. 이리 줘봐.” 박성준은 프린터에 수북이 쌓여있는 두 번째 계획서를 조심스럽게 꺼내, 책상에서 두 세 번 탁탁 쳐서 가지런하게 정리한 후 신대리에게 건넸다. 둘째 안은 신대리가 직접 작성한 내용을 박성준이 교정을 보
“윤희씨, 이 사업계획서를 다 번역하는데, 얼마나 걸리겠어?” 문득 신대리는 조윤희를 바라보며 다급히 말을 건냈다. “글쎄요, 이 정도면 제게 하루는 더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흠…. 그러면 이렇게 하자. 일단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야근 좀 더 하자. 오늘 밤에 어떤 일이 있어도 유통 전략에 대해서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고 각각의 경우에 맞는 4P전략을 모두 수립해보는 거야.” “하지만 대리님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데요? 브랜드숍, 직영영업소, 대형 전문점 직거래 등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조합하면 이건 사업계획서 하나 만드는 게 아닙니다. 팀장님도 책임 못 지겠다며, 도망가버린 판국에….” 아니나 다를까, 점점 투덜이로 변해가고 있는 박성준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 두 가지 경우만 하자. 첫째는 지금 우리 주장대로 브랜드숍 유통으로, 두 번째는 현 영업조직에서 브랜드만 하나 더 얹어서 판매할 경우로.” 신대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각각의 경우, 4P의 실행전략과 5개년 예상 매출과 손익을 정리하는 거야. 그걸 가지고 내가 내일 아침 최상무님을 만나 뵙고, 현 상황을 설명 드리고 나서 최상무님의 결정을 먼저 받아올 테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일은 앞서 걱정했던 것 보다 의외로 쉽게 풀려갔다. 이런 식의 외국 회사에 Business Proposal을 해 본 경험이 없던 신대리는 아직 컨셉 조차 정립되지 못한 M&C의 사업계획을 어떻게 작성할까 고민이 많았지만, 경험이 많은 송팀장이 이번처럼 초기에는 구체적인 컨셉이 없어도 전반적인 사업방향에 대해서만 다루면 된다고 가이드를 주자 일이 일사천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실 사업방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좀 더 구체적이고 세련되게 정리한 후, 향후 5개년 매출계획과 손익 정도만 추가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5년간의 매출을 예측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M&C의 브랜드숍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매출을 전망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신대리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일단 직영 브랜드숍을 5개 정도 오픈하고 이를 플래그쉽 스토어(Flagship Store)로 활용하여 프랜차이즈 매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럴 경우 회사의 영업부도 하나 더 새로 조직해서 별도의 사업부처럼 이원화해야 하는 한편, 새로 영업부 직원들도 모두 뽑아야 한다는 가장 큰 문제가 남